10월 26일은 역사적으로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한 날입니다.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 일대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킴.
정유재란(丁酉再亂)은 1597년 8월부터 1598년 12월까지 지속된 전쟁으로, 일본국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군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한 것입니다1. 이 전쟁은 일본에서는 당시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의 연호를 따서 게이초의 역(慶長の役)라고 부릅니다.
일본군은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공세를 이어갔지만, 명량 해전을 변곡점으로 남해안의 왜성들에 틀어박혀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유재란 때 조선군은 대부분 공격측, 일본군은 대부분 방어측에 서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에 나섰고,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여 종전을 원했습니다. 이로 인해 화의 교섭이 시작되었으나, 교섭하는 과정에서 포로가 된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일본군이 조선 왕실에 돌려주었습니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철군하여 왜성을 축조하고 전투를 중단한 채 주둔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노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전투 중에 전사하였습니다.
2. 1866년
프랑스의 조선 침략, 병인양요 중 문수산성전투 발생.
문수산성전투는 1866년 병인양요 중에 발생한 전투로, 프랑스군과 조선군이 충돌한 사건입니다.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한 후, 한양으로 진격하려는 의도를 차단하기 위해 조선군이 문수산성을 수비한 것이 시작점입니다.
프랑스군 120명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려고 소리 없이 접근하고 있었는데, 숨죽이며 그들의 동태를 살피던 한성근의 부대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자 프랑스군은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민가와 군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외세와의 전투에서 최초로 얻은 값진 승리였습니다. 이는 화력의 우세가 아닌 오랑캐로부터 조국을 지키고자 했던 이름없는 조선 군사들의 정신력의 승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성근 순무초관은 훗날 별기군 정령관으로 조선 군대를 신식 군대로 재편성하고 외세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기울인 전술의 귀재였습니다.
3. 1905년
노르웨이가 스웨덴에서 독립.
스웨덴의 독립은 1521년부터 1523년까지 이루어진 스웨덴 독립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전쟁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일어났으며, 이를 계기로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습니다.
전쟁의 배경으로는 1520년 11월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 국왕이 이끄는 덴마크 군대가 스톡홀름을 점령하고 스웨덴의 귀족들을 학살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24세였던 스웨덴의 귀족인 구스타브 바사는 다른 곳으로 도망쳐 살아남았습니다.
구스타브 바사는 1521년 1월에 달라르나 지방의 주민들로부터 "사령관"으로 추대받았고, 그는 영세 농민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결성하였습니다. 그의 군대는 전쟁을 거치며 병력을 증강시키고 여러 지역을 지배하였습니다.
1523년 6월에는 스웨덴 군대가 스톡홀름에 입성하였고, 구스타브 바사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 국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후, 구스타브 바사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핀란드를 지배하였고, 1524년 9월 1일에 체결된 말뫼 조약에 따라 스웨덴은 칼마르 동맹에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4. 1909년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정치 사상가로, 세례명은 토마스(도마, 다묵)입니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입니다.
안중근은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 몇몇 본래의 목적을 가지지 않은 동학군 부대들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09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습니다. 이후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혀 일본 총영사관으로 옮겨졌고,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넘겨졌습니다. 그는 개인이 아닌 대한의용군사령관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라 주장하였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하였습니다.
5.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대한 독립군이 승리.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또는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은 1920년 10월에 발생한 전투로, 김좌진, 나중소 (羅仲昭), 서일,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을 주축으로 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白雲坪)·천수평 (泉水坪)·완루구 (完樓溝) 등 간도에 10여 차례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10월 21일부터 시작되어 26일 새벽까지 약 일주일 동안 어랑촌, 천수평, 천보산, 고동하 등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습니다.
청산리 전투는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승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 1955년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성립.
베트남 공화국, 약칭 남베트남은 1955년 10월 26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북위 17도 베트남 군사분계선 이남에 존재했던 나라로, 군사분계선 이북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대치하였습니다.
초대 총통은 응오딘지엠이었고, 그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위 관료 및 군대 중추는 프랑스 치하에서 프랑스를 위해 복무했던 자였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에서 북부의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에 밀렸습니다.
베트남 공화국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이후 공식적인 국명이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 을 맺고 철군하였습니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 을 점령하였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7.2006년
한국의 유명한 프로레슬링 선수였던 김일 사망.
김일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프로레슬링계를 풍미했던 '박치기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2006년 10월 26일에 7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 후인 2006년에는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고, 2016년에는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헌액되었습니다¹. 그의 기여와 업적은 대한민국 스포츠계에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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